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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써키트, 반도체 패키징 기판으로 재도약하는 52년 PCB 강자
전자제품 내부를 들여다보면 초록색 판 위에 수많은 부품들이 빼곡히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PCB(인쇄회로기판, Printed Circuit Board)다. 전자부품들을 연결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이 기판 없이는 어떤 전자제품도 작동할 수 없다. 그리고 이 PCB 산업에서 52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는 기업이 있다. 바로 코리아써키트다.
공식 홈페이지: https://www.kcg.co.kr
상장시장: 코스닥
설립연도: 1972년
소속: 영풍그룹
1972년 설립된 코리아써키트는 한국 PCB 산업의 개척자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오직 PCB만을 전문으로 생산해왔고, 국내 전자산업과 함께 성장해왔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용 기판에서 벗어나 고부가가치 반도체 패키징 기판 사업으로 사업 구조를 전환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PCB란 무엇인가?
PCB는 ‘전자제품의 신경계’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 칩이 두뇌라면, PCB는 그 두뇌의 명령을 각 부품에 전달하는 신경망이다. 평판 위에 구리선으로 회로를 그려넣고, 그 위에 수많은 전자부품을 탑재해 전기적으로 연결한다.
스마트폰, 컴퓨터, TV는 물론이고 자동차, 의료기기, 항공기까지 전자장치가 들어가는 모든 곳에 PCB가 사용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PCB도 진화했다. 과거의 단순한 단층 기판에서, 이제는 수십 층을 쌓아올린 초미세 회로 기판까지 나왔다.
코리아써키트가 다루는 PCB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HDI(High Density Interconnect) 기판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 같은 모바일 기기의 메인보드다. 메모리 모듈 PCB는 컴퓨터나 서버의 RAM을 구성하는 기판이고, 반도체 패키지 기판은 반도체 칩과 메인보드를 연결하는 중간 매개체 역할을 한다.
스마트폰 기판에서 반도체 기판으로
코리아써키트의 역사를 돌아보면, 회사의 주력 제품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해왔다. 초창기에는 TV, 오디오 같은 가전제품용 기판이 주력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휴대전화용 기판이 성장 동력이 됐고,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용 HDI 기판이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특히 2019년 삼성전기가 스마트폰 메인 기판 사업에서 철수하면서, 코리아써키트는 삼성전자 갤럭시 시리즈 물량을 대거 확보했다. 한때는 이것이 큰 호재였지만,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되면서 성장 한계에 부딪혔다. 갤럭시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코리아써키트 실적도 직격탄을 맞는 구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코리아써키트는 사업 구조 전환을 결정했다. 스마트폰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고부가가치 반도체 패키징 기판 사업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FC-BGA(Flip Chip Ball Grid Array)라는 고급 반도체 기판 시장에 진출했다.
FC-BGA, 왜 중요한가?
FC-BGA는 반도체 패키징 기술 중 하나다. 반도체 칩을 기판에 연결할 때, 전통적으로는 금속 와이어로 연결하는 방식(와이어 본딩)을 썼다. 하지만 이 방식은 속도가 느리고, 칩과 기판 사이 거리가 멀어 신호 손실이 크다.
FC-BGA는 칩 표면에 작은 금속 돌기(범프)를 만들고, 칩을 뒤집어서(Flip Chip) 기판에 직접 붙이는 방식이다. 칩과 기판 사이 거리가 짧아져 신호 전달 속도가 빠르고, 전력 손실도 적다. 또한 입출력 단자를 훨씬 많이 배치할 수 있어, 고성능 반도체에 필수적인 기술이다.
FC-BGA는 주로 서버, 노트북, 통신장비, 자동차 전장 등에 사용되는 고성능 반도체에 들어간다. 특히 AI 가속기, 데이터센터용 프로세서처럼 연산 능력이 중요한 칩일수록 FC-BGA가 필수다. 단순한 스마트폰 기판에 비해 기술 난이도도 높고, 부가가치도 훨씬 크다.
코리아써키트는 2017년경부터 FC-BGA 사업을 준비했다. 2020년부터 본격 양산에 들어갔고, 2022년에는 2000억 원을 투자해 안산에 FC-BGA 전용 제3공장을 건설했다. 이 공장은 무인 물류 로봇이 돌아다니고, RFID로 모든 생산품을 실시간 추적하는 첨단 스마트 팩토리로 설계됐다.
주요 고객사와 시장 위치
코리아써키트의 FC-BGA 고객사로는 브로드컴(Broadcom)과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Microelectronics)가 알려져 있다. 브로드컴은 통신 칩과 AI 가속기용 ASIC을 만드는 글로벌 반도체 기업이고, ST마이크로는 자동차 센서와 전장용 반도체에 강점을 가진 유럽 업체다.
특히 브로드컴은 엔비디아, AMD와 함께 AI 가속기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브로드컴의 AI용 ASIC 수요가 증가하면, 코리아써키트의 FC-BGA 매출도 함께 늘어나는 구조다. 2025년 하반기부터는 브로드컴에 14층 FC-BGA를 공급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더 고도화된 제품이다.
ST마이크로에는 주로 자동차 외부 센서용 FC-BGA를 납품하고 있다. 전기차와 자율주행차가 확산되면서 차량용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고, 이 역시 코리아써키트에게는 기회다.
다만 코리아써키트가 생산하는 FC-BGA는 중저가(미드엔드~로엔드) 제품에 속한다. 최고 사양의 서버용 FC-BGA는 층수가 20층 이상이고, 미세 회로 선폭도 매우 좁아 삼성전기, LG이노텍 같은 대기업이나 일본의 이비덴, 신코전기 같은 글로벌 톱티어 업체들이 주로 생산한다.
코리아써키트는 그보다 기술 난이도가 낮은 통신용, 차량용 FC-BGA에 집중하고 있다. 경쟁이 덜 치열하고, 고객사 확보도 상대적으로 쉽다. 하지만 이 분야도 진입장벽은 충분히 높다. 국내에서 FC-BGA를 양산하는 업체는 대기업 포함해 4곳밖에 없다.
메모리 모듈 PCB, 재조명받는 분야
코리아써키트의 또 다른 축은 메모리 모듈 PCB다. 컴퓨터나 서버의 RAM은 여러 개의 D램 칩을 하나의 기판 위에 모아놓은 형태다. 이 기판이 바로 메모리 모듈 PCB다.
과거에는 메모리 모듈 PCB가 저부가가치 제품으로 분류됐다. 기술적으로 단순하고, 가격 경쟁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AI 시대가 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AI 서버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메모리 용량과 전송 속도가 매우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메모리 모듈도 고도화되고 있다. CXL(Compute Express Link), LPCAMM(Low Power Compression Attached Memory Module), SOCAMM(Small Outline Compression Attached Memory Module) 같은 차세대 메모리 표준이 등장했다. 이들은 기존 메모리보다 전송 속도가 빠르고, 전력 효율이 높으며, 확장성도 뛰어나다.
코리아써키트는 이런 차세대 메모리 모듈용 PCB 개발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SOCAMM은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차세대 메모리 표준으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같은 글로벌 메모리 업체들이 양산을 준비 중이다. 코리아써키트도 이 공급망에 진입하기 위해 연구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물론 SOCAMM의 상용화 시점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엔비디아가 당초 2025년 하반기 출시 예정이던 GB300에 SOCAMM을 탑재하려 했으나, 기술적 안정성 문제로 차세대 제품인 루빈(Rubin)으로 연기했다는 소식이 최근 나왔다. 이는 코리아써키트에게는 아쉬운 부분이지만, 동시에 준비 시간을 더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적, 회복의 조짐
코리아써키트는 최근 몇 년간 실적 부진을 겪었다. 2022~2023년 반도체 업황 침체와 스마트폰 수요 감소가 겹치면서 적자를 기록했다. 2023년 상반기에는 별도 기준 영업손실 220억 원을 냈다.
하지만 2024년 들어 회복 조짐이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 갤럭시 S24, S25 시리즈 출시로 HDI 기판 수요가 증가했고, FC-BGA 양산이 본격화되면서 매출 구조가 개선되고 있다. 2025년 3분기 누적 실적을 보면, 연결 기준으로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이 흑자로 전환했다.
특히 FC-BGA 사업이 성장하면서, 회사 전체 매출 구조가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스마트폰용 HDI 기판이 매출의 4550%를 차지했지만, 이제는 반도체 기판 비중이 3540%까지 올라왔다. 회사는 3년 내에 반도체 기판 매출이 스마트폰 기판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결 기준으로 보면 코리아써키트는 이미 ‘1조 클럽’ 기업이다. 종속회사인 테라닉스(경성 PCB), 인터플렉스(연성 PCB), 시그네틱스(반도체 패키징)를 합치면 연 매출 1조 4000억 원 규모다. 별도 기준으로도 8000억 원을 넘길 것으로 예상된다.
경쟁 구도와 리스크
PCB 산업은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다. 상위권은 대만, 중국, 일본 업체들이 장악하고 있고, 한국은 중간 위치에 있다. 특히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가 거세다. 기술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가격 경쟁력으로 물량을 쓸어가는 구조다.
반면 일본과 미국은 초고가 첨단 제품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삼성전기, LG이노텍 같은 국내 대기업도 하이엔드 FC-BGA 시장에서는 일본 업체들과 경쟁해야 한다.
코리아써키트는 이 중간 지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중국보다는 기술력으로, 일본보다는 가격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위치다. 다행히 통신용, 차량용 FC-BGA는 최고 사양을 요구하지는 않기 때문에, 코리아써키트의 기술 수준으로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
하지만 리스크도 분명하다. 가장 큰 변수는 반도체 업황 사이클이다. 반도체 시장이 침체되면 설비투자가 줄고, PCB 수요도 급감한다. 코리아써키트도 2022~2023년 반도체 불황 때 큰 타격을 받았다.
고객사 의존도도 문제다. 삼성전자, 브로드컴, ST마이크로 같은 주요 고객사의 실적이 나빠지면, 코리아써키트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특히 브로드컴 AI 칩 수요가 예상보다 적으면, FC-BGA 성장 시나리오가 흔들릴 수 있다.
기술 변화 속도도 빠르다. PCB는 반도체 칩이 고도화될수록 함께 진화해야 한다. 미세 회로 기술, 다층 적층 기술, 신소재 개발 등에 지속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연구개발 비용 부담은 중견 기업에게는 만만치 않다.
성장 가능성은 어디에?
그럼에도 코리아써키트의 장기 성장 가능성은 충분하다. 첫째, AI 반도체 시장 확대다. AI 가속기 수요는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것이고, 이는 곧 고성능 패키징 기판 수요 증가로 이어진다. 브로드컴뿐만 아니라 다른 반도체 업체들도 잠재 고객이 될 수 있다.
둘째, 전기차와 자율주행차 확산이다. 차량용 반도체는 일반 반도체와 달리 극한 환경에서도 작동해야 하기 때문에, 고품질 기판이 필수다. 전장 반도체 시장은 향후 10년간 연평균 10% 이상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셋째, 차세대 메모리 표준이다. SOCAMM, CXL 같은 새로운 메모리 모듈이 본격 양산되면, 관련 PCB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코리아써키트가 이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한다면, 스마트폰 기판 의존도를 크게 낮출 수 있다.
넷째, 국산화 수혜다. 정부는 반도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국산 부품 사용을 장려하고 있다. 핵심 부품을 해외에 의존하면 공급망 리스크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이 국산 PCB를 우선 채택한다면, 코리아써키트에게는 분명한 기회가 된다.
누가 투자해야 하나?
코리아써키트는 반도체 업황 회복에 베팅하는 투자자에게 적합한 종목이다.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된 상황에서, 반도체 패키징 기판으로 사업 구조를 전환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전환이 성공한다면, 회사의 밸류에이션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변동성은 각오해야 한다. PCB 업종은 반도체 사이클을 그대로 따라간다. 업황이 좋을 때는 급성장하지만, 나빠지면 급락한다. 코스닥 시장 특성상 테마주로 움직이는 경우도 많아, 단기 변동폭이 크다.
또한 아직 수익성이 안정화되지 않았다. 대규모 설비투자를 단행했기 때문에, 감가상각비 부담이 크고, FC-BGA 사업이 본격적인 수익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단기 실적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사업 구조 전환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지켜봐야 한다.
장기 투자 관점이라면, 반도체 패키징 산업의 성장과 함께 갈 수 있는 종목이다. 다만 코리아써키트 하나에 집중 투자하기보다는, 삼성전기, 대덕전자, 심텍 같은 다른 PCB 업체들과 비교해가며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론: 전환기의 중견 강자
코리아써키트는 전환기에 있는 기업이다. 52년 역사의 PCB 강자지만, 과거의 성공 방정식만으로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과감하게 고부가가치 시장으로 방향을 틀었다.
스마트폰 기판에서 반도체 패키징 기판으로, 메모리 모듈에서 차세대 메모리 표준으로. 이런 변화가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코리아써키트는 단순한 PCB 업체가 아니라, 반도체 생태계의 핵심 파트너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물론 쉬운 길은 아니다. 글로벌 경쟁은 치열하고, 기술 변화는 빠르며, 반도체 사이클 리스크도 상존한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PCB 한 우물을 판 기술력과, 삼성전자, 브로드컴, ST마이크로 같은 글로벌 고객사를 확보한 실적은 분명한 강점이다.
코리아써키트, 반도체 패키징 시대의 숨은 강자로 거듭날 수 있을까? 그 답은 앞으로 2~3년 안에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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